문화일보
나윤석 기자
2021년 10월 13일
2050년 환경파괴된 서울의 사계절 표현… 20일 연주회
온실가스 저감없는 미래예측
이상기온·가뭄 등 극단상태
연주해본 임지영 “너무 암울
처음 듣고 3초만에 꺼버렸다”
클래식 통해 기후변화 경고
세계 각국서 ‘사계 2050’ 진행
“인공지능(AI)이 편곡한 ‘사계 2050’을 처음 듣고 3초 만에 꺼버렸어요. ‘해괴하다’ 싶을 만큼 분위기가 암울하고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죠.”(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
12일 오후 서울 강남구 복합문화공간 오드포트. 한국인 최초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 임지영이 비발디 ‘사계’ 봄 1악장 연주를 마친 뒤 숨을 골랐다. 잠시 후 다시 활을 잡고 들려준 건 AI가 편곡한 봄 1악장. AI 버전은 원곡과 닮은 듯 달랐다. 멜로디는 유사했으나 경쾌함이 사라지고 음울한 정조가 한층 짙어진 느낌이었다. AI는 왜 비발디의 ‘밝은’ 원곡을 ‘어둡고 불안한’ 멜로디로 바꿔버렸을까.
비밀은 AI에 입력된 ‘2050년 서울의 기후 데이터’에 있다. 호주 출신 작곡가 휴 크로스웨이트와 기후변화 연구진, 프로그램 개발자가 협업해 만든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AI가 30년 뒤 ‘환경이 파괴된’ 서울의 사계절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영국 디지털 기업 AKQA가 기획한 ‘기후위기 대응 프로젝트’로 온실가스 배출 저감 없이 현재 추세가 이어질 경우를 예측했다. 이번 작업을 통해 서울뿐 아니라 독일·스코틀랜드·네덜란드 등 16개국 대표도시의 ‘사계 2050’이 탄생했다. 부제는 기후변화가 초래할 미래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담아 ‘불확실한 사계(uncertain four seasons)’라 붙였다. 최근 독일에서 AI가 작곡한 베토벤 교향곡이 초연되는 등 인간과 AI의 협업 사례는 간혹 있었으나 기후변화와 같은 전 지구적 이슈를 주제로 각국 음악계가 손잡은 건 이례적이다. 임지영은 오는 20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비발디 ‘사계’와 AI가 편곡한 ‘사계 2050-서울’을 들려준다.
임지영은 이날 간담회에서 ‘사계’ 원곡과 AI 편곡 버전의 일부를 직접 연주하며 두 곡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비발디는 18세기 작곡 당시 악보에 의도를 설명하기 위한 ‘소네트(짧은 시구)’를 적어뒀는데, AI는 기후 데이터를 반영해 비발디 소네트의 느낌을 변형하는 방식으로 편곡했다. 예를 들면 원곡의 봄 1악장 도입부엔 ‘따뜻한 봄이 왔다’는 소네트가 붙어 있으나 AI 버전은 토양의 수분이 말라가는 데이터 분석을 통해 산뜻한 느낌을 자아내는 음표 몇 개를 제거하며 불안감을 가중했다. 또 여름 1악장은 ‘뜨거운 태양 아래 지쳐버린 사람과 양’을 표현했는데, ‘사계 2050-서울’은 오케스트라 템포를 늦춰 이상 기온으로 인한 ‘숨 막히는 더위’를 묘사했다. 또 새소리를 표현한 음을 없애 생물의 다양성 감소를 경고한 대목도 있다.
임지영은 “브람스나 베토벤과 비교해 단순·명료한 비발디 음악은 지구적 이슈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기에 적합하다”며 “음악가 이전에 지구에 터 잡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연에 관심을 갖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신재현 AKQA 수석 데이터 과학자는 “2005∼2100년에 해당하는 각 도시의 위도·경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공개한 예측 시나리오 등 어떤 작업보다 방대한 ‘데이터 세트’를 분석했다”며 “세계인들이 ‘변화된 행동’을 실천한다면 수집된 데이터가 달라지고 미래 역시 낙관적 모습으로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편 서울을 포함한 세계 각지의 ‘사계 2050’은 11월 유엔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온라인을 통해 연주 실황이 공개된다.